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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조선의 대표 역사서]카테고리 없음 2023. 2. 12. 18:09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25대 국왕의 실록 28종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1392년부터 1863까지 472년의 역사를 편년체(역사 기록을 연,월,일순으로 정리하는 편찬체제)로 기록하였습니다.
전체 1,893권 888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러어져 있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 여러방면에 대한 사실을 망라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가 편찬하여 왜곡이 많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세계기록유산 등재에도 제외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실록이 편찬되었습니다 . [고려사]에 고려의 [태조실록]에 대한 기록이 있고, 감수국사 등에게 실록을 편찬하게 했다는 기록도 여러차례 나타납니다. 조선 건국 후에는 고려 공민왕부터 공양왕까지 실록을 편찬했고, 세종대에는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실록을 참고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유교적 역사의식이 강한던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역대 국왕의 기록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실록을 편찬해왔습니다. 따라서 국왕 재위기간 동안 매일매일의 일을 기록해 두는 준비 작업이 필요했고, 이는 실록뿐 아니라 [승정원일기], [일성록]등의 편찬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실록은 당대의 "현대사" 기록입니다. 실록은 국왕이 사망한 뒤 후계 국왕이 즉위한 이후 실록청 신료들이 선왕 때의 사초를 모아 편찬한 것으로, 편찬 과정에서 당대의 복잡한 정치권력의 향배가 작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왕이 바뀌었어도 선왕과 정치적 공동체였던 신하들 상당수가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고, 이는 실록 편찬 방향에 영양을 끼쳤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지금은 과거 조선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지만, 조선시대에는 편찬 당시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반영된 '현대사'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록 편찬은 정치에 대한 참여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사관이 국왕의 지근거리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는 것은 권력 남용을 제약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국왕은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태종이 말에서 떨어졌을 때 관련 사실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관은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도 기록에 남겼습니다.
실록 편찬을 담당했던 사관 구성은 모두 겸직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한림 8원'에 해당하는 예문관의 봉교 2명, 대교, 검열 4명은 춘추과의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임금의 가까이에서 보고 들은 국정 전반의 내용을 사초로 기록했습니다. 사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역사 평가나 비밀스러운 사항이 적인 것은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훗날 실록 편찬시에 제출합니다. 이를 가장사초라고 합니다.
사관의 겸직제는 세종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경국대전]의 기준에 따르면, 영의정은 영춘추관사, 좌/우의정은 감춘추관사를 겸했습니다. 육조의 판서 중 2원은 지춘추관사, 참판 중 2원은 동지춘추관사를 겸임했습니다. 그리고 수찬관, 편수관, 기주관, 기사관 등의 임무를 의정부, 홍문관, 시강원, 사헌부, 사간원 등의 관원들이 겸춘추의 직임을 띄고 수행했습니다.
사관은 사초를 쓰는 것에서부터 실록을 편찬하는 일까지 담당함으로써 조선의 역사 기록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원칙은 직서주의였습니다. 임의로 사초를 도려내거나 긁어없애거나 먹으로 지우 ㄴ사람들에 대해서는 처벌이 이루어졌습니다. 간혹 개작의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일부에서는 개작했다는 점을 밝혀두기도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사관들은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사필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역사를 서술했습니다.
실록을 본격적으로 편찬하게 되면,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가장 먼저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을 맡은 관료들을 임명합니다. 그러면 사료를 수집하는데 , 사료와 춘추관시정기, 조보, 일기, 문집 등이 망라됩니다. 광해군대 선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주요 전적이 대거 불타버려서 왜란 이전의 기록을 서술하기 위해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비롯하여 각 관료의 집에 보관된 조보, 일기 등을 찾아내 사료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각종 사료들을 토대도 초초를 완성하면, 그것을 다시 검열하여 중초가 만들어졌으며, 마지막에는 대신들의 감수 후에 정초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활자를 인쇄하여 간행, 반포했습니다. 실록을 인쇄한 것은 세종때부터 입니다. 세종은 정초본 1부 외에 활자 인쇄본 3부를 만들어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정초본이 완성되면 초초, 중초와 사초를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폐기했습니다. 자료의 유출을 막아야 했고, 최종 편찬된 실록과 상반된 자료가 남아 정쟁을 일으킬 만한 여지를 방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실록이 사고에 보관되면 국왕과 신하들은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습니다. 간혹 국정 운영에 있어서 관련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때 실록을 참고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실록은 국가에서 설치한 사고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되었습니다. 3년마다 포쇄를 하여 습기와 곰팡이 등으로부터 실록을 보호 하였고, 실록의 이상 유무를 [실록형지안]에 작성했습니다. 사고의 건축 구조도 2층의 누각 형태로 만들어 지면의 습기로부터 전적을 보호하였고, 처마를 길게 뻗게 만들어 눈,비,직사광선 등을 막았으며, 이중 창문을 통해 환기를 시키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했습니다.
사고에서 실록을 보관하는 체계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크게 변화했습니다. 본래 조선 전기 사고는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여 네 곳에 나누어 설치했습니다. 세종대부터 실록을 네본 만들어 추눛관의 실록각과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습니다. 네 곳은 모두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로 화재와 외적의 침입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중종대 성주사고의 화재를 빼면 광리상의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춘추관, 충주, 성주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 사고본은 전라감사 이광등과 여러 백성들의 노력으로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고는 모두 춘추관 외에는 모두 산중으로 설치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등재된 이유를 포함하여 실록의 가치를 몇 가지 뽑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기록이 방대하는 점입니다. 중국의 [명실록]이나 [청실록]과 비교해 봐도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있습니다. 대부분 국왕에게 보고된 사실들을 기록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풍습이나 일반 백성의 삶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도 상당합니다.
실록을 조선 전기의 역사가 기록된 유일한 연대기 입니다. 조선 전기에도 [승정원일기] 등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조선 후기의 것만 남아있습니다. 조선 전기의 역사 기록으로 개인의 문집, 사서 등이 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개인 저술이 담긴 내용도 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관이 직서주의에 입각하여 역사를 기록하였던 점은 실록이 객관성과 공정성이 반영된 기록유산임을 알려줍니다. 더불어 그들이 '사실왈' 이라고 하여 별도의 사평을 남겼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이외에도 472년간의 역사가 일관된 서술 체계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 인쇄 문화를 알 수 있는 기록물이라는 점, 편찬 이후 군주도 열람하지 못함으로써 기록의 신빙성을 확보했다는 점, 사고의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보존 상태가 좋다는 점 등의 다양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