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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왕, 태종 1-1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닦은 야망가 태종 이방원]카테고리 없음 2023. 2. 11. 01:45
태종은 본명이 이방원, 자는 유덕입니다.
1367년(공민왕 16) 5월 16일 신묘일에 함흥부 귀주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때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원의 침입을 막아내고 동녕부를 공격하던 시기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문과에 재능이 있지 않았던 것에 비해 이방원은 어렸을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일찍 죽은 동생인 이방연을 제외하고 태조 이성계의 자식들 중 유일한 문과 급제자 였습니다. 이방원은 16살이 되던 1382년 (우왕 8) 진사시를 2등으로 합격했으며, 이듬해인 1383년 (우왕 9)에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야사에서는 신덕왕후 강씨가 태종 이방원의 영특함을 부러워하였고,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의 과거 급제 당시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문한을 담당하는 제학으로 임명되었을때에는 그 임명장을 소리내어 몇번씩 읽게 했습니다. 이외에도 태조가 문신들을 초청할때면 시를 짓게 하는 등의 일을 담당함으로써 교유하는데에 더움을 주는 등 무장 출신인 태조가 할 수 없었던 영역을 태종이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본관은 여주이고 민제의 딸입니다. 6대조 민영모 이래로 유력한 중앙 관료 집안이었습니다. 민제는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검소한데다가 성리학을 존숭하여 이단을 물리치는 데 힘썼습니다. 평생 3ㅗㄴ귀함과 영화로움이 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귀한 티를 내는 바가 없어 태종이 평생의 사부로 존경했습니다.
태조의 조선 개국 전후로 태종의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1388(창왕 1) 태종은 이색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습니다. 당시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도전 등 훗날 조선을 개국하는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이색은 명에서 고려를 감국해 줄 것과 창왕의 입조를 청하기 위해 이숭인, 김사안 등과 함께 명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색은 자식이 사신으로 고려를 떠난 사이에 정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태조의 아들을 함께 데려가길 청하였고, 이때 23세인 태종 이방원이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발해에서 풍랑을 만났으나 태종은 매우 태연자약했다고 전합니다.
이성계 세력에 위기가 찾아 온 순간이 있었는제 1391년 3월 해주에서 사냥하던 이성계가 낙마했는데, 기회를 틈 타 정몽주가 이성계 세력인 조준, 정도전, 남은, 조박, 윤소종, 남재 등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시묘살이 하던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벽란도에 유숙하고 있었던 태조를 찾아가 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정도전, 조준 등의 죄를 묻는 탄핵 상소가 이성계를 조준하기 시작하여 상황은 계속적으로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머뭇거리는 태조를 대신하여 정몽주와 술상앞에서 회유의 시조를 읊었습니다.
정몽주에게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굽힐 것을 권유하면서 자신의 야망 실현의 뜻에 동참하라는 하여가를 읊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엃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
이방원의 하여가를 듣고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였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넑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
이 시조를 읊으며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자신의 일편단심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설득이 무의미 함을 깨달은 이방원은 얼마 뒤 ,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국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성계 세력의 마지막 위기이자 개국의 걸림돌을 해결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개국 된 후 이방원은 정안군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막대한 공을 세웠지만, 새로운 권력 구조에서는 배제 되었습니다.
왕실과 종친을 배제하는 속에서 군권에서도 제외되고 개국공립에도 책립될 수 없었습니다.
개국공신 선정을 주도한 태조 이성계는 아들의 공은 인정하되 친자라는 이유로 공신 선정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왕자 신분이 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지만,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이방원이 개국공신에서 제외된 것은 개국의 공로가 묻혀버린 순간이 된 것입니다.
1394년 (태조 3) 명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하자, 태종이 하신으로 떠났습니다.
명은 조선이 여진인들을 유인하여 요동을 침범하려 한다는 의문을 품고, 조선 사신을 요동에서 저지하고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이때 사신으로 가 남경에서 직접 홍무제를 만나 명의 의구심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태종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습니다. 특히 1398년 진도 연습과 요동정벌을 계기로 휘하의 사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였는데, 그때는 아버지인 태조가 병석에 누워있던 때였습니다. 이에 태종을 8월26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세자인 방석, 그 형인 방번 등을 일거에 제거하는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 1차 왕자의 난입니다. 왕자의 난의 성공을 계기로 이방원은 일거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왕자의 난 직후에는 세자 추대를 사양하고, 장자를 원칙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에 따라 형인 영안군을 세자로 세웠습니다. 권력의 대세를 가졌지만 자짓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에 여론을 생각하여 당시 생존해 있던 형들 가운에 맏형인 영안대군에게 양위를 양보하니, 그가 조선의 제 2대 왕인 정종이 된 것입니다.
1399년(정종 1)에는 조례상정도감을 설치하였는데, 태종이 조례상정도감판사가 되었습니다.
정종은 자식이 많았으나, 적처의 소생 중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듬해인 1400년(정종 2) 초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이방원이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 세자로 책봉되게 됩니다. 제 2차 왕자의 난은 왕위계승을 노린 회안군 방간과 태종 이방원 사이의 대결이었습니다. 이들은 개성 시내의 남산에서 선죽교에 이르는 일대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국 태종이 승리하였습니다. 제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며 태종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대부분 소거되었습니다.
정종은 이방원에게 선위하였고,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되고 선위를 받기 전까지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건국 후 계속 문제가 되었던 군권을 일원화하여 사병을 혁파하여 삼군부로 일원화시켰으며, 관제를 개정하여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삼군부와 의정부에 군권을 적절해 배속함으로써 군권의 쏠림과 지나친 분산을 막았습니다. 또한 승정원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했습니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고, 태종때의 왕권 강화 기반을 조성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태종은 즉위한 후 부왕인 태조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해 대두 된 것이 한양으로 재천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대에도 한양 재천도는 쉽지 않아서 4년여의 기간을 거쳐야 했고, 최종적으로 1404년(태종 4) 천도를 결정하고 1405년(태종 5) 이를 실행했습니다.
천도를 결정한 후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이궁을 건설하고 이곳에 입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창덕궁입니다.
태종은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득이한 것 외에 대규모 건축행위를 하지 않았고, 별다른 기념물도 조성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부왕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조 사후 본격적으로 항양 재정비를 들어가 왕권을 적극적으로 표상했습니다.
청개천 준천에 이어 시전 행랑을 건설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경복궁에 거창한 규모로 경회루를 새로 건설했습니다.
태종 14년 무렵에는 성곽을 제외한 전반적인 도성 내 설비가 완료 되었습니다. 또한 태종 13년부터 14년에 걸쳐 중사이하 소사까지 사전 체제가 정비되면서 사전에 올라간 수도 주변의 제단들도 이 무렵까지는 대부분 개축되거나 신축되었습니다. 태종도 이 무렵 '경읍의 체모'가 완성되었다고 여겼으며, 하윤은 도성형승지곡과 도인송수지곡 2편을 올렸습니다.
태종은 마지막으로 상황으로 있으면서 성곽까지 보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양의 모습을 일신하였습니다.